유년 시절의 이강년은 특별한 師承없이 일반적으로 학자적 소양과 유교적 가풍에 경도되어 있던 집안 분위기에서 가학을 통해 학문을 닦았다. 그 결과 운강은 경학을 중심으로 문장과 詞章 등 학문적 바탕을 어느 정도 탄탄히 구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운강이 학문적으로 성장하는 데는 특히 조부 李德儀와 백부 李起宅의 역할이 컸으며, 특히 무과 급제 후 삭주부사를 지낸 백부는 일찍 타계한 부친의 역할을 대신해 운강의 학문과 장래를 지도해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운강이 무과에 급제, 출세할 수 있었던 데도 백부의 영향과 지도가 컸을 것이다.
운강은 고종 16년 (1879)에 22살의 나이로 무과에 합격, 관직에 나아가 折衝將軍 행용양위 부사과(종6품)에 임명되었다가 宣傳官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이 나던 무렵 관직을 사퇴하고 향리 문경으로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연마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895년 갑오개혁 등 일련의 일제침략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하게 되자, 운강도 1895년 1월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관직생활 중 시국의 혼란상을 직접 목도한 운강은 청일전쟁 직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유린되던 상황에서 충군애국의 순수한 의병정신이 발로되면서 을미의병에 동참하게 된다. 곧 운강의 을미의병 참여는 유생의 신분으로 일반적으로 견지했던 충군애국사상의 자연스런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
학문과 사상 면에서 운강이 일생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은 을미의병에 동참한 가운데 화서학파의 정통 도맥을 승계한 류인석의 문하에 들어간 계기이다. 이때부터 운강은 화서학파의 학문 요체인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존화양이론을 철저히 體認하게 되었으며, 화서 문파의 여러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며 견실한 학맥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운강은 스승 의암으로부터 춘추대의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화서학파의 존화양이사상의 틀을 철저히 계승했다. 존화양이사상을 體認한 운강은 항일투쟁의 선명성과 강도를 한층 더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론적인 무장을 갖추게 된 셈이었다. 그러므로 운강의 후기의병의 궁긍적 목적은 존화양이의 의리 구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후기의병 시기의 운강의 항일전은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운강은 1907년 5월에 가서야 재기항전에 투신하지만, 실제로는 존화양이론의 구현을 위해 1905년 을사조약 직후부터 항일전을 집요하게 갈망하고 있었다. 재기항전에 대한 신념 역시 운강의 항일투쟁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귀착되었다.
운강은 일제 침략으로 인한 국가와 민족의 위기상황에서도 자주적, 주체적 국권수호론을 확고히 견지했던 인물이다. 곧 운강은 청을 비롯한 외국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우선 현실적으로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고, 설령 외국의 힘으로 일제를 구축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외국에 의해 또다시 국권이 침탈당하게 될 것으로 보았다. 결구 그는 한민족의 자주 주체적 역량에 의한 국권회복만이 민족의 전도를 보장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의 냉엄한 현실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족과 국가의 현실에 대한 이와 같은 주체적 자각이 그로 하여금 항일전선에 투신, 일제 구축의 길로 나서게 한 동인 가운데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운강은 존화양이사상과 함께 전통적인 유교관념에 입각한 충군애국정신도 견지하고 있었다. 의리와 명분사상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던 운강으로서는 이런 신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충군애국정신은 곧 운강의 거병에 중요한 정신적 동기로 작용했으며 동시에 자연스럽게 의병활동의 지향목표가 되는 것이다. 의병의 충군의식의 발로 현상은 일반적으로 전국의병의 보편적 경향성을 노정하지만, 의리와 명분에 깊이 경도된 운강과 같은 화서학파 성원의 경우에 특히 두드러진다.
운강은 항일전을 수행하는 동안 군비조달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에 대해 깊은 애착을 보이며 민폐들을 제거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타성에 젖어 무사안일의 관망적 자세를 보이던 양반 권세가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들 기득권층이 일제와 결탁함으로써 결국 인민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대한제국 시기에 국민총력전으로 승화된 의병전쟁의 중심에 섰던 이강년은 화서학파의 실천적 학문체계인 존화양이사상에 깊이 경도되었던 인물로, 이를 바탕으로 항일전의 투쟁역량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는 이런 학문 요체를 통해 국가와 민족에 대한 깊은 신뢰를 견지할 수 있었고, 이러한 충군애국 의식이 그대로 구국항일전으로 승화됨으로써 운강의 항일의병전은 더욱 밝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출처(박민영, 「운강 이강년의 생애와 사상」,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2집』, 2000)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