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아비는 평생 혈충(血忠)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하였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래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들과 함께 나 죽은 뒤 3일 안으로 박장(薄葬)토록 하라.』
『강년(康秊)은 양심이 격동함을 참을 수 없어 丙申年(1896년) 이래로, 13년간 두 번의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나 30여 회전(會戰)에서 적추(敵酋) 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중략) 이 몸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니, 하루를 더하더라도 그치는 것보다 낫다는 것도 이제는 마지막이 되었다. (중략)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세(賊勢)가 성하다 하여 본래의 뜻을 어기지 말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하시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
- 아들 승재(承宰)와 종제 강수(康壽) 및 전국의 의병들에게 남긴 고결문(告訣文)
의병이란 "의리론(義理論)과 오상(五常 : 인의예지신)정신을 주요 이념으로 하고 자발적으로 무장 항쟁하여 외적의 침략에 대항한 민군(民軍)"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가 일어나 조직하는 자위군, 즉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民)에 의한 군대이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에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한말에 이르고 있다. 한말 의병은 특히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고 있다.
이같이 오랜 의병의 역사로 인하여 특유의 의병정신이 조성되어 승패를 가리지 않고 결사 항전하는 것이 의병의 본분이라 여기게 되었으며, 의병정신이 곧 한민족의 특성 이라고까지 믿게 되었다.
이러한 믿음을 가장 정확하게 피력한 학자로는 박은식(朴殷植 : 대한민국 임시정부제2대 대통령, 한국통사 저자)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라"고 하면서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고 말한바 있다.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은 1896년 을미의병(전기의병)에서 의기를 들었고 광무11년(1907년 후기의병) 8월 19일 고종황제로부터 도체찰사의 밀지를 전해 받아, 도창의대장(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한말 13년간의 의병항쟁을 주도하다가 1908년 7월 2일 일본군의 총탄에 맞고 피체되어 10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 감옥은 1907년 대한제국을 점령한 일제통감부가 서울에 세운 형무소이다. 1908년 의병탄압을 위해 만들어졌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세워졌던 경성감옥을 시초로 하고 있으며 1923년 서대문 형무소로 개칭되었다.
이강년 의병대장은 한말 13년간의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1896년 고모성전투, 수안보전투, 제천 남산전투, 1907년 제천읍전투, 조령전투, 갈평리 전투, 괴산 연풍전투, 1908년 가평 용소동전투, 인제 백담사 전투, 제천 적성전투 등 수십 차례의 중요한 전투를 치른 이강년 의병대장은 1908년 7월 2일 적의 총탄에 맞고 피체(포로)되어,같은 해 10월 13일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의 상징인 서대문 형무소 건립 이후 최초로 교수형 순국하엿다.
"13년 동안 그는 의병장으로서 살았다. 왕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난세를 맞아 이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어졌다. 그가 벌인 전투가 몇 번이고 적을 몇이나 베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행군 과정이 그에게는 전쟁이었고 역사와 벌이는 투쟁이었다. 위대한 의병장 이강년은 그 과정에 형성된 것이다. 병사들과 함께 전선을 달리면서 민중성을 획득했던 그는 영원한 의병장이다."
-세명대학교 구완회교수(‘영원한 의병장 운강 이강년’ 저자, 2015년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