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사)운강이강년 의병대장 기념사업회

Ungang Leegangnyeon
운강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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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 의병전쟁 횃불, 선생이 남기신 숭고한 구국정신을 이어가겠습니다.

    태어난 곳
    운강은 1858년 12월 30일(음력) 가은읍 도태마을(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455-2)에서 태어났다. 효령대군(조선 태종의 차남)의 19세손으로 호는 운강(雲崗) 자는낙인(樂寅)이다. 또한 태양이 어머니의 입으로 들어 가는 꿈을 꾼 뒤 잉태 되었다 하여 아명을 양출(暘出)이라 하였다.
    가족관계
    아버지 이기태와 어머니 의령남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안동김씨와 결혼하여 1녀1남을 낳았다. 장남 승재는 운강이 거의하였을 때 종사관으로 운강을 보좌하며, 유격장의 참모로 활동하였다. 사위 김양호도 운강의진의 별장으로 활동하였다. 안동권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긍재와 명재를 얻었다.
    3형제 모두 아버지 운강의 뒤를 따라 의병항쟁에 가담하였다. 장남 승재(承宰)는 건국훈장 애국장, 2남 긍재(兢宰)는 건국훈장 애족장, 3남 명재(明宰)는 건국훈장 애족장, 그리고 가산을 정리하여 운강의 의병항쟁에 적극 가담한 4촌 동생 강수(康壽)는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성장
    운강은 3살이 될 무렵 부터 옥편에 나타나는 사람의 몸에 속하는 한자의 뜻을 알 만큼 총명하였다. 8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로부터 경사(經史)와 병법을 익히는 등, 어린 나이에 이미 문장과 학문이 성숙하였다. 장성한 운강은 8척2촌의 장골로 풍체가 늠름하고 담이 크며 위엄이 있어 무리를 압도하였다. 목소리가 우렁차서 대장부의 기상을 지니고 무예와 병서 및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운강은 22세 때 1880년(고종 17년) 음력 6월에 정시 무과에 합격하였다. 종6품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行龍攘衛副司果)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무렵 1882년 6월 임오군변과 1884년 10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운강은 정국 혼란과 친일파의 행동에 분격,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 매진하였다.
    연보
    연 월 일 나이(세)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의 발자취
    1858년 12월 30일(음력) 1 문경 가은 도태마을(상괴리 455-2)에서 이기태李起台(초명은 종태鍾台)와 의령남씨 사이에서 태어남
    1866년 9월 9 부친 별세
    1877년 20 안동김씨 풍균豊均의 딸과 혼인
    1878년 21 장녀 출생(김양호金養浩에게 출가)
    1880년 6월 23 무과 급제
    1881년 4월 24 조부 별세
    1881년 6월 25 맏아들 승재承宰 출생(~1910)
    1885년 28 삭주부사에 부임하는 백부(기택起宅)를 좇음
    1886년 7월 30 초취부인 김씨 별세(1856~1886)
    1888년 31 안동권씨 인호仁浩의 딸과 혼인(1868~?)
    1889년 32 둘째 아들 긍재兢宰 출생(~1953)
    1890년 36 셋째 아들 명재明宰 출생(~1947)
    1895년 가을 38 동학농민봉기에 참여했다는 주장이 있음
    1896년 2월 23일 39 가은 도태장터(상괴1리)에서 봉기
    2월 25일   농암장터에서 안동관찰사 순검 등 3명 효수
    2월 27일   고모산성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항전
    3월 14일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湖左義陳의 유격장이 됨 수안보·조령 등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접전
    1897년 4월 40 김상태와 함께 요동에 머물던 유인석을 찾아 뵈옴
    7월   단양 금채동에서 모친을 모심
    10월   유인석이 귀국한다는 말을 듣고 서울까지 갔다가 돌아옴
    1899년 42 〈화서집華西集〉 간행과 배포에 힘씀
    1900년 43 영춘 남천 마을로 거처를 옮김
    1901년 봄 44 문경 완장으로 옮김
    1902년 봄 44 유인석에게 글을 올려 〈소의신편昭義新編〉출판을 반대하는 뜻을 전함
    11월   모친 별세
    1905년 48 원용팔과 정운경의 봉기에 병으로 참여하지 못함
    1907년 4~6월 50 제천에 머물며 의병을 일으킴. 단양 용소동에서 패전하고 부상을 입음(4월15일)
    8월 13일   제천에서 민긍호·조동교·정대무·오경묵 부대와 연합 이때 원주진위대의 무기를 얻은 윤기영과 함께함
    8월 15일   제천 전투에서 승리
    8월 19일   영월 주천에서 의병대장에 오름
    8월 23일   충주성 공격
    9월 7일   문경읍 장악
    9월 10일   갈평 전투에서 승리
    9월 18일   영춘에서 이명상 부대와 합류하고, 뒤에 조동교 부대와 연합
    9월 29일   청풍의병장 조동교 처단
    10월 4~6일   영월 전투
    10월 22일   싸리재 전투
    11월 2~11일   죽령 부근에서 전투
    12월 16일   복상골 전투에서 패전. 그 뒤로 북상
    1908년 1월 10일 51 경기도 화악산 대청동에 도착
    3월 19일   화악산의 거릿내 부근에서 전투
    5월 중순   영월 상동에 도착
    5월 17~19일   봉화 서벽·내성 전투
    6월 4일   재산전투
    7월 2일   작성산 전투에서 피체
    10월 13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 과천(현 방배동) 효령대군 묘역에 출빈出殯
    12월 13일   제천 두학동 장치미로 반장返葬
    1916년 12월   제천에서 〈운강선생유고〉 3책 편찬(필사본)
    1944년   상주 화북유림들에 의해 묘소를 화북면 입석리 산11번지로 이장
    1948년 겨울   용궁에서 〈운강선생창의일록〉 목활자본 출간
    1949년 봄   〈운강선생문집〉 목활자본 출간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962년 6월 3일   “海東義士雲岡李先生康秊之碑” 제막(문경 가은역앞)
    1967년 8월   “창의대장도제찰사운강리공전승기념비” 제막(문경 갈평)
    1994년   문경 완장리에 ‘이강년 생가’ 복원
    2002년   ‘ 운강이강년기념관’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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